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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과 수수께끼 (삿 14: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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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 of the eater, something to eat; out of the strong, something sweet."


최요한 목사


사사기 14장은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이스라엘의 대적인 블레셋과 대치하고 있는 삼손의 모습 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블레셋 속에서 사랑을 찾고 쾌락을 얻으려는 삼손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 삼손은 곧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인물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수수께끼를 풀면서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고 말하면서 삼손이 낸 수수께기의 정확한 답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표면적으로 그들은 삼손이 낸 수수께끼의 답을 말했습니다. 곧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는가?’라고 말하면서 먹는 자는 사자이고 먹는 것은 꿀이고, 강한 자는 사자이고 단 것은 꿀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손의 수수께끼와 블레셋 사람들의 답을 이렇게만 이해하고 넘어간다면 성경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블레셋 사람들의 수수께끼를 통해서 사사기의 저자는 삼손의 상태를 비꼬면서, 동시에 장차 삼손과 블레셋의 관계를 성경독자들에게 어렴풋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손은 대적인 블레셋, 곧 삼손과 대적하여 싸웠던 사자와 같은 블레셋 속에서 사랑을 얻으려 했습니다. 이 사랑은 삼손에게 너무나 달콤한 것이었고 너무나 강한 것이었습니다. 삼손의 놀라우리만큼 엄청난 힘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강한 것이 바로 여인의 유혹과 사랑이었습니다. 삼손은 강한 힘을 가진 강한 자였지만, 여인 앞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삼손의 수수께끼에 대한 답이자 동시에 다른 수수께끼인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의 답은 쾌락적인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블레셋 사람들이 낸 수수께기의 이차적인 의미입니다.

 

삼손은 이 사랑에 넘어가 자기가 낸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주었고, 나중에는 다른 여인인 들릴라에게 넘어가 자기 힘의 근원에 대해 이야기 하고 결국 블레셋에 잡혀가 두 눈이 뽑히고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두 번씩이나 그는 대적들 속에서 달콤한 사랑을 따먹다가 결국 강한 자를 무너뜨리는 그 사랑으로 인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낸 수수께기는 삼손의 의도로는 먹는 자인 사자에게서 먹는 것인 꿀이 나오고 강한 자인 사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고 했지만, 이것은 삼손 수수께기의 일차적인 의미입니다. 이러한 삼손과 사자의 만남은 곧 삼손과 블레셋의 만남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삼손은 먹는 자가 사자로 생각했지만 사실 먹는 자는 삼손이었습니다. 그는 사자의 몸에서 나온 부정한 것을 먹었습니다. 나실인으로 구별되어야 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동물의 시체를 만지고 거기서 나온 것까지 먹었습니다. 삼손의 수수께끼의 이차적인 의미는 이렇습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자가 나온다는 말은 먹는 자인 삼손에게서 먹는 것인 식물이 나오는 것을 뜻합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 맷돌을 가는 일을 하게 되는데, 이 맷돌을 가는 삼손에게서 먹는 것인 음식물이 갈아져 나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다’라는 말에서 강한 자도 삼손인데, 그에게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가 부리는 재주를 보고 즐거워하는 장면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곧 삼손의 운명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삼손이 블레셋에 끌려가 그곳에서 맷돌을 갈면서 블레셋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을 보여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삼손은 수수께기 같은 인물이지만 우리는 삼손의 이야기를 통해서 두가지의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삼손과 블레셋 사람들의 수수께끼의 진정한 의미이며, 영적진리입니다. 첫째는 이 삼손이 바로 장차 오실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모든 면에서 예수님과 비교되는 삼손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알 수 있게 됩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수태고지를 받아 태어났습니다. 예수님도 태어나시기 전에 가브리엘 천사의 수태고지를 마리아가 받았습니다. 삼손은 거룩히 구별된 나실인으로서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부정한 것에 손을 대고 부정한 것을 먹고 삭도를 머리에 댔습니다. 삼손은 쾌락을 좇고 육신의 정욕을 좇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죄인의 모습으로 살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죄와 거룩히 구별되어 흠 없는 어린양으로 하나님께 속죄의 제물이 되셨고 충성되이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죄의 유혹을 물리치시고 죄에 물들지 아니하신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죄의 권세를 이기시고 죄에 짓눌린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삼손은 죄에 빠져 살았지만 예수님은 죄로부터 자유로우시고 죄로부터 인간을 자유케 하셨습니다. 삼손은 죽으면서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대적 원수로부터 구원하였습니다. 그가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면서 하나님의 택하신 영적 이스라엘을 원수 마귀와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삼손의 수수께기에서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만 만찬을 드시면서 떡을 떼시며 축사하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하셨고, 잔을 주시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떡을 떼서 드시고 잔을 드시는 먹는 자이신 예수님께로부터 먹는 것인 떡과 포도주, 곧 생명의 말씀과 죄 씻음의 보혈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다고 한 말씀은 유다 지파의 사자이신 예수님에게서 구원의 은총이 나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강한 자는 사자이고 사자는 예수님입니다.


또한 이 삼손은 바로 영적 이스라엘인 바로 우리를 가리키고 있다고 하는 점입니다. 삼손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 여인 즉 사라의 몸에서 태어난 민족입니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예표입니다. 삼손과 사자의 만남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삼손이 사자를 찢었듯이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찢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물리쳤어야 했을 대적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그들의 것을 탐내고 쾌락을 즐기는 삶은 곧 삼손이 죽은 사자의 부정한 몸에서 달콤한 것을 찾아내고 결국 블레셋 족속의 여인과 육체적 사랑과 쾌락에 빠져 나실인의 사명을 거스리고 점차로 패망해 가는 모습을 통해 이스라엘로 거울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 거룩히 구별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치 삼손에게 나실인으로서 살아갈 사명을 주셨듯이, 우리에게도 거룩히 구별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가 영적 이스라엘다운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히 구별되어 예수님의 피로 모든 죄를 씻음 받고 죄로부터 구원받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명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 오히려 삼손처럼 세상의 달콤한 쾌락을 좇으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삼손을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히 구별되어 하나님의 성민이 된 우리들은 세상의 타락한 문화의 달콤한 유익과 쾌락을 바라며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로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고통과 수치를 이겨 내신 강한 자이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예수님처럼 오늘도 나를 세상의 쾌락을 좇아 살도록 유혹하고 넘어지게 하는 나의 대적 원수마귀와 싸워 이겨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대적 원수마귀에 예수 이름을 선포하며 당당히 맞서 싸워 승리의 깃발을 휘날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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